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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 #2 :: 2009/04/20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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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보수와 진보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평합니다. 이념적인 입장을 떠나 객관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따져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보수에 대한 비판은 저 스스로 만든 기준에 의한 것일 뿐 어떤 이념적 잣대로 비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수든 진보든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해야 마땅한 일 아닙니까? 지금 보수가 우리 사회를 쥐락펴락하고 있기 때문에 비판의 화살이 주로 그들을 겨냥하게 될 뿐입니다.

예를 들어 ‘한반도 대운하사업’ 문제는 이념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그것을 구상한 측이 보수든 진보든 관계없이, 그 자체로 경제적 타당성이 전혀 없는 사업입니다. 그런데 이 사업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저는 하루아침에 ‘좌빨’이 되고 말았습니다. 보수 정권이 정력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에 훼방을 놓았으니 너는 좌빨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논리입니다. 이런 허황된 논리가 판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입니다.

종합부동산세나 부동산, 혹은 교육과 관련한 현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것도 이념과 무관한 일입니다. 그 정책들이 합리성을 결여하고 있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정책들이 우파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비판하는 저는 저절로 좌파가 되어버립니다. 그동안 현 정부의 정책에 대한 제 비판에 정당한 근거를 들어 반박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표현으로 저를 매도하는 사람들만 많이 보았습니다.

최근에 안 사실이지만, 예전에 저에게 배웠던 학생들은 저를 상당히 보수적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더군요. 솔직히 말해 저는 그런 얘기를 듣고 상당히 놀랐습니다. 저 스스로는 그렇게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었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명색이 소득분배이론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쓴 사람인데, 어떻게 보수파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제 심정이었습니다.

제가 미시경제이론을 주로 가르쳤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주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시경제이론을 배워본 사람은 잘 알겠지만, 그것은 가치판단이 완전히 배제된 채 순수한 경제적 논리로만 구성된 이론입니다. 그런 이론을 가르치다 보니 자연히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주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은 문학적이라는 인상을 주고, 예술을 가르치는 사람은 예술적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처럼 말입니다.

1980년대에 제가 운동권 학생과 ‘끝장토론’을 한 적이 있다는 한 일간지의 보도는 과장된 측면이 있습니다. 운동권 학생과 설전을 벌였으니 보수적이라는 말인데,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가르치는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에는 결코 물러서지 않고 반박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비주류경제학보다 주류경제학의 현실설명력이 더 크다는 제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실 주류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어느 정도 보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가 배운 것을 모조리 부정하지 않고서야 시장이 효율성을 가져다준다는 믿음을 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주류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 보수적 색채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도 예외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저는 다만 시장이 만능이라는 생각을 거부하고 있을 뿐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1980년대의 저와 지금의 저 사이에 기본 입장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때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던 사람이 지금은 진보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회 전반의 분위기가 보수화된 데 그 이유가 있다는 것이 제 믿음입니다. 저는 예전의 위치를 그대로 지키고 있는데 사회가 오른쪽으로 움직이다 보니 제 위치가 왼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회 분위기의 변화에 편승하지 못하고 예전의 위치를 그대로 고수하고 있는 저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일까요? 저는 절대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비록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인상을 줄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달라지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보수화의 바람이 결국 한때의 유행이었음이 머지않아 밝혀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미 그 전조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지만, 우리 사회의 보수는 스스로가 판 구덩이에 떨어지는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봅니다. 현 정부가 온 사회를 대상으로 실험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프로그램의 문제점이 속속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여정부에 실망한 국민은 무언가 다른 것을 실험해본다는 데 솔깃한 심정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설마 더 나빠지랴?”는 심정으로 보수적 정책 프로그램에 손을 들어주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나빠질 수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나빠져도 크게 더 나빠질 수 있습니다. 정책을 공부한 사람은 소위 ‘개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압니다. 개혁을 한답시고 추구한 변화가 결국 개악이 되고 마는 사례가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고 계획이 치밀하다 하더라도 진정한 개혁으로 이어지기는 무척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정책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아마추어만이 이것저것 바꿔놓기만 하면 개혁이 된다고 믿을 따름입니다.

제가 보기에 정부는 지금 위험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실험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정책 프로그램은 검증되지 않은 소박한 아이디어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그 정책을 실행에 옮겼을 때 나타나는 결과는 그들의 기대와 판이하게 다를 가능성이 큽니다. 설익은 아이디어의 섣부른 실험은 예기치 못한 재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 3편>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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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 #1 :: 2009/04/16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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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을 《미시경제학》과 아고라 ‘미네르바’의 경제학 교본이었다는 《경제학 원론》의 저자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는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뉴욕주립대학교(올버니) 경제학과에서 가르쳤고 1984년부터 서울대학교 경제학부에서 경제학원론, 미시경제학, 재정학 등을 가르쳐 왔다.

26년 동안 강단을 지키며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며 그 밖의 활동과 거리를 유지해온 저자는 《이준구 교수의 쿠오바디스 한국경제》를 통해 뜨거운 이슈인 대운하사업, 종합부동산세 개편, 한미 FTA, 주택정책, 경기부양책, 교육개혁 등을 날카롭게 통찰했다.


젊었던 시절 저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글을 별로 쓰지 않았습니다. 어디서 원고 청탁이 오면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그대로 거절해버리고는 했습니다. 그렇게 한 데는 존경하는 선배 선생님의 충고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분에게서 젊었을 때부터 신문에 글 쓰기 시작하면 공부에 지장이 많다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다 보면 원고 쓰는 일이 무척 성가시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사회적 문제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은 더 큰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교수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반드시 언론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밝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수는 자신의 강의실에서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의견을 밝히는 것이 정도(正道)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믿음 때문에 심심치 않게 들어오는 원고 청탁을 서슴없이 뿌리칠 수 있었습니다.

교수의 사회적 기여에 대해 제가 생각했던 바는 대략 이랬습니다. ‘강의실에서는 학문적 지식의 전달뿐 아니라, 인생과 사회에 대한 폭넓은 의견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교수가 강의실에서 한 말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활동을 할 단계에 이르러 그들의 행동에 반영된다. 따라서 교수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학생들을 이끌어 감으로써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 신문에 글 쓰는 일에 그리 큰 보람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고 청탁을 한 번, 두 번 거절하고 나면 그 뒤로는 청탁이 전혀 들어오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 그 교수는 원고 청탁해도 바로 거절해버려”라는 말이 돌면 구태여 청탁을 하려 들지 않나 봅니다. 아마 그때 저에 대해서도 그런 평판이 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중년에 이르렀을 때는 원고 청탁을 받은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저에게는 이런 상태가 그리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회적 문제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책을 써낸 바람에 그것들을 개정하는 데만도 꽤 많은 시간을 써야 했습니다. 간혹 꼭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한두 개의 글을 써서 신문에 기고하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런 제 심경에 큰 변화가 오기 시작한 것은 3년 전쯤이었습니다. 갑자기 보수의 물결이 우리 사회를 휩쓸게 되면서 오직 한 가지 소리만 들려오기 시작하는 게 아닙니까? “시장은 좋고 정부는 나쁘다. 환경규제든 부동산규제든 모두 풀어버려야 한다. 기업의 기를 살려줘야 우리 경제가 살아난다. 부자를 못살게 굴면 안 된다.” 어디를 가든 이런 소리만 들릴 뿐 이와 다른 소리는 전혀 들을 수 없었습니다.

신문을 펴들고 그 안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어느 신문인지만 알면 그 안에 무슨 얘기가 씌어 있을지 뻔히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사뿐 아니라 칼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가 쓴 칼럼인지 구별할 필요조차 없었습니다. 이름을 가려놓으면 누가 쓴 글인지 전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천편일률적인 말만 늘어놓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제학자가 쓴 글과 신문사 논설위원이 쓴 글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이 한편으로 짜증스럽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들여가며 그런 뻔한 글을 왜 쓰느냐는 생각이 저를 짜증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얘기는 이미 수없이 많이 나와 있는데 구태여 또 쓸 필요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듣게 되면 엉터리도 진리처럼 들리는 법입니다. 이 사람이 말하고 또 저 사람도 똑같은 말을 하니 사람들이 정말로 그런가 보다 하고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결과 여론이 무작정 한쪽으로만 쏠리는 걱정스러운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보수의 회오리바람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것도 합리적 보수가 아닌 거의 도그마에 가까운 보수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 거센 기세에 눌려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목소리조차 변변히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말이든 틀린 말이든 조금이라도 진보의 색채가 내비치면 가차 없이 매도당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렇게 보수 일변도로 치닫는 사회 분위기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감을 느꼈습니다.

누군가 나서서 목소리를 내주지 않으면 사회적 균형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기감마저 감돌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상아탑에 안주해 입을 닫고 살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는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주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저로 하여금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게 만들었습니다.



<마지못해 사회비평의 붓을 들다 2편> 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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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 <경제학 원론>의 저자 이준구 교수가 쓴 첫 경제 시론집 :: 2009/04/15 16:54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봤을 《미시경제학》과 아고라 ‘미네르바’의 경제학 교본이었다는 《경제학 원론》의 저자 서울대 경제학부 이준구 교수가 첫 경제시론집 《이준구 교수의 쿠오 바디스 한국 경제》를 푸른숲에서 출간하였습니다.

26년 동안 강단을 지키며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며 그 밖의 활동과 거리를 유지해온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뜨거운 이슈인 대운하사업, 종합부동산세 개편, 한미 FTA, 주택정책, 경기부양책, 교육개혁 등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있습니다.


경제는 오른쪽이 아니라
옳은 쪽을 향해야 한다!!!

뉴딜은 토목공사가 아니라 진보적 사회정책이다

뉴딜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이 정부가 싫어할 만한 것들로 꽉 채워져 있다. 연방정부의 개입 범위를 획기적으로 넓히고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하며, 주식시장과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를 새로 도입하는 등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명백한 퇴보라고 평가될 만한 프로그램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주택문제는 더 짓는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는 집을 많이 짓는다고 해서 주택가격이 안정되지 않는다. 단기적으로 볼 때 주택가격 안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매물로 내놓는 집의 양의 증가다. 그렇기 때문에 주택가격 안정이란 관점에서 보면 매물로 나오는 주택의 양을 늘리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종부세는 공평과세에도 유리하다
우리의 현실에서는 공평한 과세라는 측면에서 종부세 같은 재산 과세가 갖는 장점이 특히 두드러진다. 최근 다시 문제가 된 바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고소득층의 탈세가 유달리 심하게 일어나고 있다. 소득의 정확한 파악이 힘들다는 사실을 악용하기 때문인데, 종부세는 이와 같은 소득세의 문제점을 훌륭하게 보완해줄 수 있다. 소득을 감추기는 쉬워도 부동산을 갖고 있는 것을 감추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공평성은 조세의 원칙 중 원칙이다
바람직한 조세제도가 가져야 할 성격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모든 경제학자가 한 입이 되어 말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조세부담의 공평한 분배’다. 조세부담이 공평하게 나눠지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기쁜 마음으로 세금을 내지 않는다. 과거의 역사를 보면 공평하지 못한 조세부담이 왕조의 몰락을 가져온 숱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조세부담의 공평한 분배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말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부세를 없애려는가

종부세가 재산세로 통합되는 순간 누진적 과세는 불가능해진다. 주택을 세 채, 네 채씩 갖고 있는 사람에게 무거운 세금을 매길 수 있는 길이 없어진다는 말이다. 정부에서는 재산세율을 누진적으로 만들 뜻을 내비치고 있지만, 이것은 고도의 기만전략이다. 재산세율을 아무리 누진적으로 만든다 해도 전국 각지에 여러 채의 주택을 가진 사람들에게 무거운 세금 부담을 안길 방법은 없다. 재산세는 각 지방차지단체가 독자적으로 부과, 징수하는 세금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감시와 통제는 시장을 위해서 필요하다
이번 금융위기에서 한 줄기 위안을 찾을 수 있다면, 시장근본주의의 폭주에 제동을 걸 기회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부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시장을 갖다 앉히면 그게 바로 개혁이라는 맹목적 논리는 이제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시장의 자율 못지않게 시장에 대한 적절한 감시와 통제도 중요하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대학입시를 어떻게 바꿔도 사회적 이득은 없다
고교등급제와 관련한 상황은 완벽한 영합게임의 성격을 갖는다. 따라서 높은 등급을 받게 될 학교의 학생들이 받는 이득은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을 받게 될 학생들이 받는 손실로 완전히 상쇄되기 마련이다. 대학은 좀 더 능력 있는 학생을 선발할 수 있다고 좋아하겠지만,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본 이득은 바로 0 그 자체다. 현 상황에서 B대학에 갈 학생을 고교등급제를 채택해 A대학에 배정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과연 어떤 이득이 오게 될까?

영어 공교육 강화는 기회비용이 너무 크다

영어수업 시간을 더 늘리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렇게 함으로써 희생해야 하는 것들의 가치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만약 국어, 산수, 음악수업 시간을 영어수업 시간으로 대체함으로써 학생들이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새 정부가 말하고 있는 영어 공교육 강화방안에는 그와 같은 고려를 한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영어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더 좋은 것처럼 얘기되고 있는데, 그와 같은 논리는 시간의 기회비용이 0이라는 비현실적인 가정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한미 FTA는 체결하는 쪽이 이득이다

대부분의 예측은 한미 FTA가 가져오는 이득이 손해보다 더 크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고 있다. 사실 이것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결과인데, 무역을 자유화함으로써 생기는 손실이 이득보다 더 크다는 결과가 나오기는 본질상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미 FTA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이 결론을 뒤집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협정 체결로 인해 어려움이 예상되는 부문, 특히 농업에 대한 적절한 대책이 마련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한미 FTA를 반대해야 할 분명한 이유는 찾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방어적 수단으로서도 한미 FTA는 불가피하다
한미 FTA를 하는 경우의 이득이 별로 크지 않다 해서 하지 않는 경우의 손실 역시 작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득을 얻는다는 적극적인 입장이 아니라, 손해를 줄인다는 소극적인 입장에서 볼 때도 한미 FTA에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점이 있다.

삼겹살에도 비만세를 부과해야 할까?

국민이 건전하지 못한 행동을 한다 해서 정부가 간섭하기 시작한다면 과연 어디까지 가야 할까? 비만을 일으키는 음식이 햄버거, 핫도그, 콜라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갈비도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고, 삼겹살과 소주도 비만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심지어는 밥과 빵도 너무 많이 먹으면 비만을 일으킬 수 있다. 정부가 삼겹살에 세금을 매기고 국민이 먹는 밥의 양까지 지켜보고 있어야 하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우리나라가 ‘부자를 괴롭히는 나라’라고?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는 오히려 부자들이 살기 좋은 편에 속한다. 우리 사회에는 부자에 대한 증오범죄라는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강절도 범죄의 피해자는 부유층보다 빈곤층에서 더 많이 볼 수 있다. 세금만 하더라도 우리는 부유층의 부담이 상대적으로 가벼운 편이다. 또한 집과 땅만 사놓으면 돈을 버니 부자가 재산 불리기에도 너무나 좋은 나라다.

8년으로 충분하다!

양극화 문제는 날로 심각한 양상을 띠어가고 있는데,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부자 편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부자를 더 부유하게 만들어 주어야 경제가 빠르게 성장한다는 것은 구시대의 낡은 패러다임입니다. 이 패러다임에 기초를 둔 레이거노믹스는 초라한 성적표를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레이거노믹스의 잔광을 되살리려 안간힘을 쓴 부시 행정부는 미국 국민을 불행의 구덩이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8년으로 충분하다”(Eight is enough.)라는 구호가 왜 한 순간에 미국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요?

* 이준구 교수가 독자에게 전하는 글을 푸른숲 블로그에 7회에 걸쳐 업데이트 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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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2008/07/17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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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 지음 | 김아타 표지 사진 | 12,000원 | 324쪽

한 번도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 독특한 한 권의 책
인터뷰와 독서 에세이의 절묘한 만남
삶의 결정적 순간들을 책으로 만나본다

진중권, 정이현, 공지영, 김탁환, 임순례, 은희경, 이진경, 변영주, 신경숙, 문소리, 박노자


<책 소개>
정혜윤 PD가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의 이야기. 그녀가 만난 사람들의 인생을 책으로 엮어본 작은 전기이다. 한 개인이 책과 만나는 지점에 관한 이야기가 주축이 되고 있다. 정혜윤, 인터뷰이, 책이라는 세 명의 주인공이 균형감 있게 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번 작품의 방점은 무엇보다 책에 있다. 인터뷰이들의 삶을 바꾼 책들을 통해 그를 이해하는 동시에 그 너머에 있는 책을 만난다. 책을 통해 만날 수 있는 삶의 다양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책에 대한 헌사로 시작하는 정신에 대한 헌사
                          
_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으로 독서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정혜윤, 그의 두 번째 에세이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가 푸른숲에서 출간되었다. 2007년 10월부터 온라인 서점 예스24 웹진에 연재한 칼럼을 묶은 이 책은 우리나라 문화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독특한 개성의 인물 11명의 인터뷰 모음집이다. 하지만 이 책은 평범한 인터뷰집이 아니다. 저자는 ‘당신을 만든 책은 무엇인가’라는 독특한 주제의 인터뷰를 통해 한 인물의 정신적 행로를 그려 보이고 있다. 짧은 텍스트 안에 응축된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문학적, 사상적, 철학적 시발점을 만나는 즐거움과 동시에 책에 대한 각자의 독특한 감수성을 맛볼 수 있다.
특히 책 전반을 관통하는 아련한 분위기―다락방에서 책을 읽는 어린 활자중독자들의 내면세계―를 담담하게 연출한 표지 사진은 세계적인 사진작가 김아타가 촬영했다.

그들은 도대체 무슨 책을 읽었을까?
                                
_우리 시대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결정적 11인’,
 그들 삶의 비밀을 푸는 열쇠를 쥐다

우리 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공지영,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여배우 문소리, 신랄한 비판과 풍자의 대명사 진중권, 첫 장편소설로 폭발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차세대 유망주 정이현……, 도대체 그들은 어떤 시간을 통과해왔기에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발산하며 우리를 매혹시키는 것일까?
저자는 이 질문의 해답을 그들이 읽은 책에서 찾고 있다. 현재 그들이 다다른 지점에 이르기까지 점점이 박혀 있는 삶의 결정적 순간들을 책과 연관시켜 그들의 내면세계를 엿볼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 책에서는 낯익은 작품 속의 인물들과 주제, 작가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인터뷰이가 살아가면서 느꼈던 아픔과 고통, 깨달음과 자연스레 어우러지고 있다. 공식적인 발언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인터뷰이 개개인의 비밀스럽고 사적인 체험들이 대중들에게 익숙한 책에 기대어 그 실체를 드러낸다. 독자는 진중권의 신랄한 비판적 정신이 마크 트웨인에 빚지고 있음을, 변영주의 우렁찬 목소리 뒤에 김지하의 시가 있음을, 임순례의 소외된 계층에 대한 관심 저변에 제인 구달과 소로우의 철학이 깃들어 있음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이진경이 꼽는 가장 아름다운 책이 《벽암록》이고, 박노자가 첫 번째로 꼽는 책이 《장자》이고, 변영주가 인생의 교훈을 얻은 책이 《슬램 덩크》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들의 숨겨진 일면에 신선한 충격을 받을 것이다.

책, 그것은 결국 소통이다
                                            
_한 인물의 개인적인 독서를 넘어선 책에 대한 오마주
 전작과 마찬가지로 정혜윤은 소설과 시를 비롯해 고전과 인문서, 베스트셀러 등 국내외 분야를 폭넓게 아우르는 깊은 책 읽기를 선보인다. 하지만 이번 책에서는 사적인 독서 체험을 확장시켜 소통으로 가는 길을 모색했다. 동일한 책을 매개로 끝없이 이어지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책에 관한 수다(?)는 책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과 이를 통한 존재의 다양한 실존 가능성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저자는 책과 책이 겹쳐지면서 만들어지는 섬세한 결을 통해 한 인물의 개성을 오롯이 드러내 보이는데, 그녀만의 독특한 인물 해석은 가히 독창적이라고 할 만하다. 특히 동일한 책에 다다르는 다양한 길(임순례와 정이현은 둘 다 폴 오스터를 사랑했지만 그들이 폴 오스터의 작품에 공명하는 부분은 상이하다)에 관한 이야기는 한 개인의 주관성과 책의 객관성이 은밀하게 섞이면서 형성되는 유니크한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이때 형성된 세계는 한 개인의 정신세계를 넘어서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때론 한없이 유쾌하고, 때론 지독히 엄숙한 독서 여정은 한 개인이 책을 통해 한 시대와 교우하면서 온몸으로 구현해낸 지난 시대의 아픔과 환희를 그려 보이고 있다.

활자중독증에 걸린 책벌레들, 그들의 유별난 감수성을 만나다    
        
_독서, 그 순수한 즐거움에 관한 이야기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는 다양한 개성의 인물들이 독서라는 행위의 순수한 즐거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독서라는 행위를 통해 친구를 사귀고, 사랑을 하고, 다른 세계를 만났던 이야기는 책이라는 존재가 삶에 미치는 다양한 영향들을 증거한다. 책의 무게에 압도되지 않고, 오히려 책을 자유롭게 이용해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간 이야기. 책과 만나고 그 책을 통해 다시 세상과 만난 이들의 이야기. 특히 활자가 그들의 시선을, 마음을 사로잡았던 순간의 이야기는 순수한 독서의 즐거움을 잊어버린 이들에게 아스라한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아울러 인터뷰 중간 중간에 자신만의 독서 방법을 소개하고 있기에 장서가나 애서가들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지은이 및 표지 사진작가 소개>
지은이: 정혜윤
책 좋아하는 사람이랑 수다 떨기, 책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사랑하기, 책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따라 하기, 책에 나오는 음료와 음식 먹어보기, 책에 나오는 음악 찾아 듣기, 책이 알려주는 장소 가보기, 읽었으면 행동하기 등 자칭 ‘책 행동학’(?)의 창시자이고 싶어 한다.

<김어준의 저공비행>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행복한 책읽기> 등 시사교양 프로그램과 휴먼다큐 등을 기획?제작한 시사다큐 전문 프로듀서로, 현재 <시사자키>와 <뉴스쇼 스페셜-책과 문화>를 담당하고 있다.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라는 부제가 붙은 《침대와 책》으로 독서광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표지 사진: 김아타

현대미술의 본거지 뉴욕을 뒤흔든 세계적인 사진작가. ‘나(self, ego)와 존재’에 대한 관심을 담은 ‘세계-내-존재(世界-內-存在)’ 시리즈, 관념으로부터의 해체를 담은 ‘해체(Deconstruction)’ 시리즈, 유리 박스 안에 성과 폭력, 이데올로기 등을 담은 ‘사적인 박물관The Museum Project’ 등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최근에는 뉴욕, 베이징, 상하이, 인디아 등을 오가며 시간 속에서 사라짐으로써 존재하는 것에 대한 탐구 정신을 담은 ‘ON-AIR 프로젝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목차
 
진중권 _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정이현 _불안으로 가득한 삶 안에 숨어 있는 열정
공지영 _세상과 자신 사이의 화해, 나는 살기 위해서 읽었다
김탁환 _한 권의 책은 더 나은 삶에 대한 열망
임순례 _어떤 인물도 딱히 무엇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
은희경 _읽었던 것들의 지혜가 끝나는 순간의 새로운 깨달음
이진경 _저는 내면이 없는 인간이에요.
변영주 _그래야만 하는가? ……그래야만 한다!
신경숙 _한 시절의 순수를 찾아서 자기 자신을 소모해버린 끝의 긍정
문소리 _빛은 내부에서 온다
박노자 _불교와 장자에 심취한 사회주의자

정혜윤 PD의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내용 엿보기 - 은희경 편

 

은희경은 자신의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에 수록된 「고독의 발견」에 doors의 노래 ‘people are strange’와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한 편을 끼워 넣었다. 그 문장들은 이렇다.

네가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낯선 존재가 된다
네가 혼자일 때 타인의 얼굴을 모두 추악해 보인다
아무도 너를 원하지 않을 때 여자들은 모두 사악하다
네가 힘들 때는 걷는 거리조차 울퉁불퉁하다
아무도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네가 낯선 존재일 때, 네가 낯선 존재일 때
- doors의 <people are strange>

알려진 것과 알려지지 않은 것 사이엔 문이 있다.
- 윌리엄 블레이크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를 읽는 동안 건축학자 짐멜의 말이 공감각적으로 서서히 떠올랐다.

로마 대성당 혹은 고딕식 성당에서 벽면을 차지하던 입구가 차차 줄어들어 고유한 의미로서의 문으로만 남게 됐을 때 그리고 반기둥들과 조형물들의 간격이 점점 더 줄어들고 그 사이에 문이 자리 잡게 되었을 때 이러한 문이 가지는 의미는 분명히 사람을 밖이 아니라 안으로 인도하는 데 있다. 이 같은 구조는 마치 자명하지만 부드러운 제약처럼 방문자를 바른길로 확실하게 이끈다. (『다른 곳을 사유하자』 중에서)

그래서 짐멜에게 인간은 “경계 없는 경계적 존재”였다. 하지만 이런 문의 역할은 이제 변했다. 문은 더 이상 타인에게 넘어오라고,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드럽게 손짓하는 세계가 아니라 구획 짓고 밀어내는 세계로 변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고독의 발견이 아니라 고독의 발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독의 발명 시대에도 고독의 발견은 최초의 단서란 점에서 너무나 중요하다. 즉, “네가 이방인일 때 사람들은 모두 낯선 존재가 된다”는 단서를 찾아서. 한때 스스로 만들어낸 비밀과 고독 속에 있던 소녀가 (즉, 고독을 발명하던 소녀가) 「고독의 발견」이란 글을 쓰기까지 은희경은 어떻게 살았을까? 도어스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또 다른 시에서 자신들의 팀 이름을 발견한다. 그 시구는 이렇다. “지각의 문이 깨끗이 닦이면 모든 것이 무한히 드러나리.” 은희경은 그걸 알았을까?


은희경은 전북 고창에서 건설업을 하는 가정의 맏딸로 태어난다. 경제 규모에 비해서 교육열이 엄청나게 높았던 그 마을의 이미지는 그녀의 소설 『비밀과 거짓말』의 서두에 매혹적으로 드러난다.

K읍은 예로부터 인물의 고장이라고 불리어왔다. 그래서 K읍 출신이라고 하면 예사로 보지 않으며 인물로 보려고 하는 그런 분위기 같은 것이 오늘날에도 남아있다. 실제로도 K읍 사람들의 교육열은 유난한 데가 있어 웬만한 집의 장남들은 으레 국민학교나 중학교를 마치는 대로 도시로 보내졌다. 여행자들이 길이라도 묻기 위해 어느 집 마루에 걸터앉으면 높다랗게 내어 걸린 사진틀 속에서 도시에 나가있는 그 집 장남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채송화 봉숭아 따위가 심어진 보잘것없는 마당과 어둑식한 대청마루, 감나무가 그늘을 드리운 뒤란 할 것 없이 집안 전체를 감싸고 있는 늘 어떤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갈망과 불만 속 체념의 기운을 포찰할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 교육열 높은 소읍에서 여섯 살의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덜떨어진 한편 도도한 꼬마 숙녀 은희경은 어느 날 엄마 아빠와 함께 택시를 타고 전주로 나가 전주에서 가장 큰 서점(홍지서점 정도로 우리는 기억을 맞췄다. 전주에서 자란 사람들은 아마 그 서점을 다 기억할 것이다. 그 서점 근처에 소문난 욕쟁이 할머니 콩나물국밥집이 있었으니까. 그 서점은 훗날 전주 출신 소설가 양귀자 씨의 남편이 인수했단 소문이 있다)에서 《새소년》 같은 잡지와 동화책 한 권을 선물 받았고, 그리고 양품점에 가서 에나멜 구두 한 켤레를 받았다. 반짝반짝 에나멜 구두와 함께 받았던 책의 제목은 ‘반지의 왕자’인지 ‘장미의 왕자’인지 명확하게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데도 그 첫 책의 기억은 스무 살 무렵까지 나이에 따라 각색되면서 따라다녔다고 한다.

“나중에 물어봐도 그 책에 대해선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뒤로 많은 공주 왕자 이야기를 읽었지만 그 책만큼 강렬하진 않았어요. 그 책은 제가 처음으로 엿본 환상의 세계 같은 것이었는데 그 환상은 시골 읍내에서 살고 있는 여덟 살짜리 시골 아이의 일상과 묘하게 연결되는 어떤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책 속의 왕자는 한결같이 멋진 왕자가 아니었어요. 이를테면 그 왕자는 장미꽃을 갖고 있으면 정말 멋진데, 장미꽃을 떨어뜨리면 그 순간 너무나 형편없어지는 것으로 인생이 설정되어 있었어요. 세 가지 정도가 왕자의 삶의 제약 조건이었는데 장미꽃을 떨어뜨리면 안 된다. 반지를 빠트리면 안 된다, 자기 영지를 벗어나면 안 된다, 이 정도였던 것 같아요. 장미꽃이 떨어지면 얼간이가 되고 자기 영지를 벗어나면 픽픽 쓰러지는 왕자. 이 이야기가 나한텐 어떻게 읽혔느냐 하면, 완전히 거꾸로 읽히는 거죠. 지금 나는 이렇게 평범하지만 뭔가를 발견하면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 나도 나만의 장미, 나만의 반지, 나만의 영지를 찾으면 진짜 멋져진다. 그걸 몰라서 이 모양 이 꼴이다.”

은희경이 첫 책을 쓰던 해, 소설을 쓰러 집을 나설 때 갖고 갔던 책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완벽하지 않은 왕자는 우리에게 그를 비웃으라고 등장하는 게 아니다. 그를 통해 분수를 지키라거나 룰을 지키라는 교훈을 얻으라고 등장하는 게 아니다. 우린 단점과 약점으로 서로를 위로하란 걸 알려주려고 등장하는 거다. 은희경은 고학년이 될 때까진 학교 도서관의 책을 굉장히 많이 봤는데 2층 맨 구석에 있던 2학년 1반 옆 교실의 어린이도서관 자리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게 그 뒤론 그렇게 도서실이란 걸 열심히 다닌 일이 한 번도 없어서란다.

“그때도 어른들이 생각할 때 좋다고 생각한 책에 끌렸다기보다는 어린이 책치고는 악의에 차 있는 것들, 절망적인 것들에 오히려 인상을 받았어요.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예요. 아이가 병을 하나 주웠는데 병 속에 춤추는 악마가 들어 있는 거예요. 자기가 불행을 벗어나려면 그 병을 누구에겐가 줘야 하는데 그걸 주는 행위는 알고도 남을 괴롭히는 행위이므로 고민이 되는 거죠. 난 이런 상황의 느낌이 너무 크게 다가왔어요. 무심코 주운 빈 병이 불행의 계기였단 게 의도하지 않았던 순간에 불운이 온다는 이상한 조숙한 깨달음 같은 것도 줬고 어느 순간에는 내가 남에게 짐을 떠맡겨야 자유로워진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이렇게 무서움을 느끼는 이야기가 재미있고 신나는 이야기보다 더 끌렸는데, 사는 게 좀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돌려 말하면 부모가 말하는 대로의 세상이라면 너무나 뻔한 것 아니냐? 그게 아닌 것 아닐까? 이런 것이었던 것 같아요.”

이를테면,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같은 책에 끌렸단 것인데 언제나 조숙한 아이들은 묻는다. “이게 다야?”라고.

은희경은 자신의 현재 문학의 전 재산은 초등학교 때의 글자 중독에 가까운, 닥치는 대로의 ‘한 바퀴 도는 독서 편력’이었다고 단언한다. 살면서 많은 일을 겪었지만 초등학교 때의 그 ‘닥치는 대로의 한 바퀴 도는 독서’만큼 그렇게 신나고 즐거운 일은 다시없었던 것 같다고 한다.

“집에 배달되던 농민신문인 《새농민》도 열심히 읽고 《건설회보》도 읽었어요. 읽는 것에 대한 갈증이 심했어요, 『고금소총』 같은 금서도 초등학교 때 읽고 《고전 해학 전집》도 읽고 밤색 표지였던 여섯 권짜리 《강소천 전집》은 아주 좋아했어요. 《새농민》이 오면 연재소설을 꼭 읽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해줬어요. 가끔 빼놓고 못 읽으면 할 수 없이 지어내서 이야기해주고. 기억나는 소설은 월남 파병된 군인이 나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전선에서 고향집에 두고 온 여자를 생각하는 장면엔 꼭 나오는 말이 ‘인명은 재천이다.’란 말이었어요. 폭격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별빛을 보면서 애인에게 편지를 쓰는데 ‘인명은 재천이다.’라고 쓰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을 혼자 이해하고 나중에 써먹기 시작했는데 그 말이 누가 누구를 그리워할 때 하는 말인 줄 알고 연애 감정을 표현할 때 써버린 거죠. ‘난 네가 좋아.’라고 해야 하는데 ‘인명은 재천이다!’ 이렇게 고백을…. 또 하나 에피소드는 그런 연재소설엔 신혼부부의 첫날밤을 엿보는 장면이 꼭 나와요. 그런데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내 주위엔 그렇게 엿보는 일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아무리 책은 많이 읽었어도 애는 애니까 삼촌에게 물어봤죠. ‘옛날에는 첫날밤에 구경할 만한 재미난 일을 하던데, 요새는 첫날밤 아무 일도 안 하느냐? 요샌 통 안하는 것 같아서 내가 좀 섭섭하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폭소를 터트렸는데 그 폭소는 다른 시대를 살았어도 이불 속 독학자들의 하는 짓은 비슷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의 경우는 ‘천고마비의 계절이다.’라는 말을 ‘하늘은 높고 나는 (네가 너무 좋아서) 마비된다.’라는 사랑의 고백으로 써먹었던 적이 있다. 어린 나이의 이불 속에서 이뤄진 비밀스러운 독서는 이렇게 자랑스러운 흔적을 남긴다.) -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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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

    Tracked from 룰루랄라 문화생활 | 2008/08/07 15:08 | DEL

    진중권, 정이현, 공지영, 김탁환, 임순례, 은희경, 이진경, 변영주, 신경숙, 문소리, 박노자 이 사람들의 사상과 주관을 만드는데 영향을 끼친 책들에 관한 이야기! 좀 두서없는 글 진행방식에 혼란스럽기도 하지만, 내용 자체만 놓고 보자면 마음에 드는 책이에요.. 덕분에 읽고 싶은 책이 몇십권 늘어버리기도 했지만...-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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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읽기 :: 2008/07/17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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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이케스 지음 | 권석만 옮김 | 376쪽 | 18,000원 | 2008년 6월 3일 발행

공감(共感), 관계를 여는 인간의 여섯 번째 감각
                                        
공감 정확도 연구의 선구자 윌리엄 이케스가 말하는 마음 읽기의 과학

 오래 산 부부일수록 공감 정확도가 떨어진다
여자의 직감력은 재해석되어야 한다
  불행한 부부는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공감을 적당히 회피하는 지혜가 관계를 지킨다


1. 도서 소개 
태어나는 순간부터 타인과의 접촉을 시작하는 인간에게 타인의 마음을 읽고, 생각과 감정을 공유하는 ‘공감(empathy)’은 생존과 직결되는 가장 기초적인 능력이다. 자폐증 환자가 자기 삶을 책임지지 못하고 사회 안으로 쉽사리 들어올 수 없듯이, 타인의 마음을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는 삶의 모습과 질을 크게 좌우한다. 그렇다면 이 공감 능력을 측정할 수도 있을까? 그 결과가 인간관계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마음 읽기》는 공감이라는 심리 활동의 원리를 밝히고, 그 능력을 측정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여 마음 읽기에 관한 오해와 진실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는 목적에서 쓰인 책이다.
 
저자 윌리엄 이케스는 인간관계 연구의 권위자이자 공감 정확도 연구의 선구자로, 미리 짜인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기존의 실험사회심리학에 반감을 느끼고 연구자의 조작을 최소화할 수 있는 획기적인 비디오 실험을 고안했다. 실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는 두 참가자의 ‘자연스러운’ 행동을 비디오로 녹화한 다음, 각자에게 녹화 테이프를 보여주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하거나 감정을 느꼈던 순간마다 비디오를 정지하고 그 내용을 적게 한다.

그다음에는 같은 방식으로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추측하여 적게 한다. 이렇게 얻은 실제 생각/감정과 서로가 추측한 생각/감정의 유사성을 수치화한 결과를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조합 및 합산하여 백분율 정확도 점수로 환산한다. 이것이 곧 그 사람의 ‘공감 정확도 점수’가 된다. 이 책은 30년 이상 이 실험을 정교하게 다듬어온 이케스의 연구 여정을 따라가며, ‘마음 읽기’라는 주제가 심리학이라는 과학의 영역에서 어떻게 연구되고 있는지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윌리엄 이케스는 자신이 고안한 비디오 실험을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마음 읽기’라는 주제의 다양한 측면을 연구했다. 정말 여자가 남자보다 타인의 마음을 잘 읽을까? 쌍둥이들은 텔레파시가 통할까? 상대의 마음을 정확하게 읽으면 반드시 관계가 좋아질까? 이 책에서 제시한 다양한 실험 결과는 우리가 막연히 알고 있는 일상의 통념을 명쾌하게 증명해주기도 하고, 철저하게 뒤집기도 한다. 독자들은 그 촘촘히 엮인 증명과 반증의 과정을 따라가며 근거 없이 통용되는 ‘심리학 상식’을 바로잡고, 한층 과학적인 마음 읽기의 기술을 만날 수 있다.

2. 출간 의의
공감 능력의 부재가 초래한 위험 사회
안양 초등학생 납치 피살 사건, 남대문 방화, 유영철 연쇄 살인 사건 등 최근 우리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범죄의 본질적인 원인은 ‘공감 능력의 부재’였다. 범인들은 사람을 때리거나 죽일 때 죄의식은 물론 슬픔이나 고통, 심지어 긴장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정신의학 용어로 사이코패스(psychopath)라고 불리는 이 사람들은 타인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관철시키거나, 뚜렷한 동기도 없이 엽기적 범죄를 저지른다. 인간의 공감 능력을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개발하는 문제는 대인관계의 차원을 넘어 사회의 안전과도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다.

공감 능력도 정확한 측정과 훈련이 필요하다

이처럼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공감 능력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지만, 심리 활동의 일종인 공감을 어떻게 객관화하여 분석하고 개발해야 할지 구체적인 노력은 미흡한 실정이다.《마음 읽기》는 인간의 공감 능력을 과학적으로 측정하고 그 원리와 필요조건을 밝혀내기 위한 30여 년에 걸친 시도와 그 결과를 담은 책으로, 공감 능력 향상을 위한 기초적인 지식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심리학은 독심술이 아니라 과학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사회심리학자이자 윌리엄 이케스의 스승인 엘리엇 애런슨은 이 책을 위한 추천사에서 자신이 실제로 겪은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심리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오해를 유머러스하게 지적했다.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이라고 하면 타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독심술과도 같은 능력을 떠올린다는 것이다. 그는 이케스를 이런 일반적인 기대를 정교한 실험을 통해 연구해온 진지한 과학자라고 평가하며,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마음 읽기에 관한 과학적 연구 결과들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3. 추천의 글
이 책은 우리 인간이 타인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우리의 마음 밖에 존재하는 타인과 어떻게 ‘심리적인 접촉’을 하게 되는지,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는지,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친밀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를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에 관한 물음을 다루고 있다. _ 권석만(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알게 되는가? 우리는 다른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저자가 마음 읽기에 관한 과학적 연구들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_ 엘리엇 애런슨(《사회심리학》 저자,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심리학자 100인)

4. 저자 및 역자 소개
저자 : 윌리엄 이케스(William Ickes)
미국의 사회심리학자로 현재 텍사스 대학 알링턴 캠퍼스의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사회적 상황에서의 인간 행동을 연구하는 ‘사회적 상호 작용 실험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친밀한 인간관계, 문화와 종족, 대인 관계의 과정, 사회적 인지 등의 주제를 연구해왔다. 공감 정확도 연구의 선구자로서 대인 관계 국제 네트워크에서 수여하는 버셰이드/햇필드상(1997년), 대인 관계 연구를 위한 국제 학회에서 수여하는 새로운 공헌상(1998년)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공감 정확도》《양립 관계와 대립 관계》가 있다.

역자 : 권석만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임상심리 수련 과정을 이수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퀸즐랜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임상심리 전문가 및 정신보건 임상심리사(1급) 자격을 취득했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현대 이상심리학》《인간관계의 심리학》《우울증》《자기애성 성격장애》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인지치료의 창시자 아론 벡》《단기심리치료》《심리도식치료》《정신분석적 사례 이해》《정신분석적 심리치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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